여러분, 사장이 되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사장의 딸로 태어나거나, 하버드 MBA를 따거나,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라고 합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3번, 저를 갈아 넣어 노력해서 사장이 된 케이스입니다.
자칭 MH 전문가 (맨땅에 헤딩)로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시작한 회사를 2,000배 이상의 가치로 키운 고군분투 생계형 CEO의 인생 이야기 지금부터 들려드릴게요!
저는 1990년 6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아빠와 독서지도사 엄마, 언니까지 네 식구가 어느 날은 당장 내일 쌀 떨어지는 걸 걱정할 만큼 어려웠지만 또 돌이켜보면 진짜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을 나누면서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저희 아빠는 당시 월급이 9만 원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적토성산’이었던 가훈처럼 티끌 모아 태산 하신 부모님은 지금 30억짜리 집에 살고 계십니다. 그래도 아직 또렷하게 기억나는 게, 제가 어느 날 아빠한테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했다가 맞은 적도 있었어요. 진짜 어렸을 때였는데 다 큰 지금도 그땐 정말 서운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반면 저는 진짜 하고 싶은 게 많은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엄마가 매달 피아노 학원 가라고 흰 봉투에 몇 만 원을 넣어주시면 그걸로 다음 달엔 몰래 태권도 학원을 가고 그 다음 달엔 수영장을 또 몇 달을 모아 미술 학원도 가보고 하면서 죽어도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해보고야 마는 그런 열혈 k-초딩이었습니다.
그 즈음 서강대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입사를 22살에 끝내버린 아주 똑똑한 언니를 보면서 '아, 나는 공부가 아닌 방법으로 내 나름의 살길을 찾아야 하는구나'하고 진즉 현실을 인정하고 깨달았어요. 수학 시간이 제일 재밌다는 언니와 달리 저는 쉬는 시간과 친구가 제일 좋은 인간이었습니다. 항상 회장, 부회장, 전교 회장, 학생회, 방송반 온갖 곳에 오지랖을 부리며 지금 생각해 보면 믿을 수 없지만 인생 최고의 인싸 시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안산에 있는 특수 목적 고등학교인 '한국 디지털 미디어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여기서는 방송 촬영, 개발, 디자인, 상업, 기획 등 정말 다양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 이것저것 시도해 보던 습관 덕분인지 저는 제법 할 줄 아는 게 많은 인간이라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주변을 돌아보게 되니,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각자의 살 길을 찾았더라고요. 예를 들어 피아노를 같이 배우던 친구는 평생 피아노를 잘 배워서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수영을 같이 배우던 친구는 수영 선수가, 그림을 그리던 친구는 디자인을 전공하겠다고 했어요.
그 즈음 혼란이 왔던 것 같아요.
나는 피아노도 바이올린도 플루트도 태권도도 수영도 발레도 심지어는 디자인도 개발도 기획도 다 할 수 있다고. 누가 나한테 갑자기 뭘 시키든 다 해낼 수 있다고 자부하고 살아왔는데
'근데 나는 정말 뭘 잘하지?' ‘나는 과연 무슨 일을 업으로 할 수 있을까?' '다들 무언가 하나를 열심히 해서 벌써부터 꿈의 일부를 이루어냈는데...’ ‘나만 끈기 없이 하나를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그간 이것저것 너무 쉽게 포기해버린 걸까?'
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33살인 지금도 나의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데 20살의 홍유리는 그게 참 뒤쳐지는 것 같고 무서웠나봐요.
그렇게 아장아장 카오스 속에서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인이 되자마자 나름대로 고등학교에서 배운 전공을 살려 대학 생활과 함께 한 개발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디지털 미디어 고등학교는 회사들이 꽤 선호하는 학력에 속했어요. 친구들이 이제 막 20살이 되었으니 몸값도 그리 비싸지 않겠다, 엄청 전문적이지는 못해도 두루두루 제네럴리스트가 되어 다양한 실전 영역을 배웠겠다, 하며 다양하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던 시기였어요.
덕분에 작은 개발사에서 아르바이트로 고용해 주셔서 당시 3,000원대의 최저 시급으로 60만 원대의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하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믿을 수 없지만 어도비의 플래시라는 툴로 웹사이트를 만들고 HTML 일명 드림위버 날코딩으로 제법 큰 기업들의 회사 홈페이지를 만들어 줬었네요. 처음에는 방학에만 일할 생각이었는데 대표님이 프로젝트 단위로 도급해 주셔서 학교 다니는 내내 일을 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이 작고 귀여운 월급이 자주 밀렸습니다.
회사 공용 메일로 오는 수많은 견적 문의 메일을 보고 있는 저로서는 수백만 원짜리 프로젝트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왜 내 월급을 밀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대표님께 이 프로젝트들을 맡게 해달라고 설득을 하기 시작했어요.
대표님은 작은 금액 대비 사고가 나면 보수 비용이 크기 때문에 쉽게 허락하진 않으셨지만
- 제가 100% 알아서 진행할 것
- 혹여나 팀 빌딩이 필요하면 제 친구들을 데려다가 해결할 것
-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직접 책임질 것 등을 약속하여
결국 이 모든 프로젝트들을 도맡아 진행하게 되었어요.
pm으로 역할을 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내 월급이 밀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고, 또 ‘고난과 역경은 항상 나를 성장시켰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 월 60만 원의 인건비로 5,000만 원 정도의 순익을 견인할 수 있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귀한 경험이죠.
그리고 진짜 감사하게도, 대표님은 이 수익의 일부를 제게 쉐어해주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받은 인센티브는 매출에 비해 정말 소액이었지만 20대 초년생에 비하면 제법 큰돈을 벌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직장인'들이 흔히들 말하는 N년차 디자이너, N년차 개발자, N년차 기획자의 평균값에 속하는 그런 연봉이 아닌 ‘내가 일하는 만큼 벌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돈에 대한 관점이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막상 일을 할 땐 월급이 밀리면 도망을 가지 오지랖퍼는 왜 괜히 그런 말을 뱉어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생각하기도 하면서 주말에도 허벅지 꼬집어가며 밤새 납기를 맞췄는데 그것이 준 교훈과 성장은 역시나 기대 이상으로 짜릿했어요.
돌이켜 보니 그렇게 저는 대학 생활 내내 누구보다 열심히 아르바이트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놀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만 안 했네요? (ㅎ_ㅎ)
그렇게 역시나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하는 인간. 한 번은 저의 생명과 같은 스케줄러 다이어리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시기가 하필 9월쯤, 다이어리 시장이 비수기일 때였다 보니 시중에서 원하는 디자인의 다이어리를 찾지 못해서 셀프로 다이어리를 만들었습니다. 500권은 만들어야 제작해 줄 수 있다는 인쇄소의 말에 그 길로 500개의 다이어리를 만들어 1300K, 텐바이텐에 입점해서 판매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다이어리 같은 걸 만들고 어떤 디자인을 할 때마다제가 손글씨를 써서 작업을 해야 했는데 그게 너무 번거로워 제 이름을 넣은 폰트도 개발했어요.
이름하야 홍도르체! 홍유리+효도르의 합성어로 저의 20대 별명입니다.. (TMI 지만, 네.. 저는 힘이 세요.. 😊)
이 폰트는 앱에 등록되어 구매가 발생될 때마다 수수료를 받기도 했고 이를 계기로 캘리그래피 강의, 나만의 폰트 만들기 수업을 하기도 했었어요.
하다 하다 속옷도 만들었는데요. 저는 체형이 큰 편이라 국내에서 맞는 속옷을 찾기가 힘들어 매번 해외 직구로만 속옷을 사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서양 브랜드이다 보니 동양인 체형인 제게는 묘하게 맞질 않아 불편했고 결국 벼룩시장에 있는 <속옷 봉제 공장 이모님 구함> 글을 보고 공장에 대뜸 찾아가 속옷을 만들어 달라 했습니다. 기가 차하시던 공장 사장님은 "'저랑 똑같은 사이즈'를 60명만 구해오면 만들어 주겠다"라고 했었는데 또 파워 블로거였던 저는, 500명을 구해서 결국 500개의 속옷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벌써 2012년, 10년 전 일이네요. 이렇게 살아가는 저를 보며, 어느 날 저의 첫 회사 대표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너와 같은 사람이 큰 비즈니스 하는 거라고"
피아니스트도 되지 못했고, 수영 선수도 되지 못했고, 화가도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다 할 줄 알아서 어떤 직군과도 충분히 말이 통하는 그렇지만 전문 영역은 스페셜리스트에게 배짱 좋게 맡길 수 있는, 해내고자 하는 바는 엄청난 추진력으로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그런 사람들이 사업을 해야 한다고. 큰 일을 해야 한다고.
저는 처음부터 당신이 회사에 묶어둘 수 없는 그릇이었다고요. 그 뒤로 저는 이커머스 회사, 광고대행사 경력을 거쳐 2016년 지금의 주식회사 원테이커를 설립하게 됩니다.
한참 전이기는 했지만 500개의 속옷을 만들 당시 제가 만든 똑같은 디자인의 속옷을 80개나 구매한 찐팬도 계셨고 그때 구매했던 수백 명의 고객분들도 계속 블로그로 속옷의 재생산을 요청해 주셨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사업이라는 걸 도전하기엔 너무도 작은 모수였지만 언제나 그랬듯, 저는 또 just do it 무모할지언정 성장할 것이고 설령 모든 걸 잃더라도 회생이 가능할 때 잃자 생각하고 도전합니다.
다만 속옷 사업이 제 단순 니즈만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인체 공학적 설계가 중요한 영역이라고 판단해서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소액에 지금의 브랜드 ‘더잠’을 인수했고 그 후로 17년도 30억 대, 18년도 50억 대, 20년도 80억 대, 올해 22년도는 1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예상 견인하며 연평균 2-30%씩 성장하는, 지금은 제 인생의 전부인 더잠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걸 그리고 있는 오늘은 2022년 8월 8일! 개인사업자 4년, 법인 사업자 6년의 시간을 지나 10년 동안 고군분투 생계형 CEO로 살고 있어요.
이렇게 초단 시간 인생을 압축하려니 어쩐지 모든 과정이 매끄러워 보일 수 있겠지만 당연히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얻은 것과 잃은 것의 총량은 비례했습니다. 집도 없이 월급도 없이 수년간 숙식했던 시간들, 유럽 가는 비행기 한번 타본 적 없이 여전히 주 70시간씩 일하는 일상, 14억의 빚더미에 매일 눈을 감아도 떠도 앞이 깜깜했던 날들, 법적 분쟁과 갑질, 배신이 난무한 생태계에서 얻은 불면과 대인기피, 공황장애까지.
뭐 이루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정말 무엇 하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 기나긴 여정이 가끔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할까 회의감과 함께 지독히 버겁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덕분에 넓힐 수 있었던 나의 그릇과 생물학적 나이와 본디 가진 뇌 용량에 비해 훨씬 더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인생, 무엇보다 더 나은 사회와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명예로움과 우리의 존재에 감사를 전해주는 고객들의 칭찬 덕분에 저는 또 툭툭 털고 일어나 오늘을 살아냅니다.
아, 개인적 이야기 말고 회사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방법론에 대해 궁금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 아마 이건 제가 한 달은 밤을 새워야 다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언젠간, 천천히 제품, 마케팅, HR, 영업 한 영역씩 노하우를 압축해 영상이나 글에 담아볼게요. 그래도 확실한 건 저는 오늘도,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도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모든 생각을 상상만 하지 않고 이행합니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많은 노력으로 메꾸어내야 하는 무모하고 부족한 인간이지만 저와 같이 나를 갈아 넣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길 바라며, 이상! 사장의 딸도 아닌 하버드 MBA 생도 아닌 MH 전문가 (맨땅에 헤딩) 인간 홍유리의 DRAW MY LIFE 마칩니다.
또 만나요! ❤